구마모토 리헤의 벽운장과 그의 사진 > 사진자료실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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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리헤의 벽운장과 그의 사진 > 사진자료실 - 일본

[주택+촌락] 구마모토 리헤의 벽운장과 그의 사진

한동수 2009-04-30 (목) 09:43 10년전 972






碧雲莊은 壹岐의 印通寺港을 내려다 보는 돈대에 있다. 조선에서 개인적으로 재산을 쌓아 올린, 현지 출신의 구마모토 리헤(1880-1968)가 쇼와 16년에 주택으로서 지은 것이다. 구마모토 리헤는 경응의숙을 중퇴 후, 한때, 동창생인 이키 출신의 마츠나가 야스 가문이 경영하는, 코베의 복마츠쇼회에 있었다. 그 후, 조선에 건너, 마츠나가를 개입시켜 일본재계로부터 자금을 원조 받아 그 자금으로 조선의 토지를 약 4,000정보 매점해 군산에 구마모토 농장을 경영해, 막대한 재산을 쌓아 올렸다. 그곳에는 2,700호의 농가를 있으며 지금의 이키 지역의 농가수가 약 3,500호인에 이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그 규모가 컷는지 알 수 있다. 4,000정보는 세로, 가로 약 6.3 km의 길이의 농장이다. 구마모토는 1904년 3천 엔으로 군산 개정에 농장을 개설했다. 1907년 그의 농지는 1,500정보에 이르렀고 1925년경에는 군산·익산·정읍·김제·부안 등지에 모두 3,000정보의 농지를 소유하는 대지주로 성장했다. 이주완씨(80·군산시 개정동·전 개정병원 약국장)는 구마모토가 일본 이끼섬 출신으로 배를 이용한 상업을 하는 부친 덕에 부유했다고 전했다. 나가사키 상업학교를 마치고 게이오대학 이재과를 나온 구마모토는 신문에 조선개발의 글을 발표하여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장의 후광을 업고 군산에 도幣? 농장이 안정된 후 그는 주로 동경의 요양지 오다하라에서 거주하며 농장은 일지를 점검하고 보고를 받아 관리했다. 부인 구마모토 구미꼬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아들만 둘 두었는데 차남은 영국에 유학하여 게이오대학 영문과 교수를 지냈다.  웅본농장 화호지장은 연간 7만 석을 수확하는 거대규모로 구마모토는 이 지역의 군주나 다름없었다. 그는 우선 유능한 직원을 확보하였다. 정씨 증언에 의하면 구마모토는 예사 지주가 아니다. 주도면밀한 인텔리겐차였다.  “제 초급이 45원이었어요. 당시 물가를 기억할 순 없지만 상당히 고액이었지. 웅본농장 화호지장에는 모두 27∼28명의 직원이 있었어요. 일본인이 많았고 고학력 조선인 직원도 채용했지. 구마모토는 관개시설을 갖추고, 쌀 생산량을 늘려 양산시책을 펴던 당국의 호의를 얻고 대신 고율의 소작료를 받는 방법으로 이익을 극대화했어요.”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 혹은 농장은 일본인 직원들에게는 오늘날의 상여금과 같은 ‘가봉’을 주었으나 구마모토 농장은 달랐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임금 격차가 없었으며 대신 고임금으로 우수한 인력을 확보했다. 일본인 직원들은 가봉이 없는 것에 불만을 품기도 했으나 구마모토 위압에 눌려 그 앞에서는 감히 불평하지 못했다.  화호지장의 주요 농토는 김제 부량·부안 백산·정읍 화호 등지에 분포했다. 농토는 모두 12개 구로 나누어 담당 농업기사에게 생산지도를 시켰다. 웅본농장이 주력한 것은 저지대 농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로를 개설하는 것과 녹비재배, 추경(秋耕·가을 갈이) 등이었다. 수로는 당국의 협조를 받아야 했고, 녹비재배란 논에 자운영을 심어 땅힘을 기르고 비옥하게 하는 방법으로 군 농업반에서 장려하던 시책이었다. 기사들은 소작인들에게 추경을 독려했으며 따로 축산기사를 채용하여 소를 소작인들에게 유료로 빌려주기도 했다. 축산기사는 ‘소 선생’이라고 불렀다. [출처] 8. 화호 근대유적3-화호 웅본농장과 일본인 거류지(상)|작성자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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