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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오 츄우타(伊東忠太)를 넘어서

한동수 2010-02-15 (월) 20:38 10년전 1880  
1936-37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토오 츄우타(伊東忠太)에 관한 책을 보았다. 그가 답사를 다닌 여정을 표시한 지도도 있었고 답사 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실로 놀라운 답사일정이었고 남긴 방대한 기록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전무후무한 건축역사가라고 생각된다. 예전에 중국건축사를 공부할 때 양사성과 유돈정, 주계검에 대하여 존경을 넘어 그 무엇을 느꼈는데 이토오 츄우타 역시 그러했다.
불행하게도 동아시아 삼국에서 유독 우리에게만 이런 학자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물론 이 판단은 전적으로 개인적으로 도달한 결론이므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유섭 선생님을 거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지금까지 판단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중국, 일본의 학자와는 많은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국가를 잃었던 1910년 그날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도 이런 열정을 가진 학자가 나와야 할 때다. 적어도 동아시아의 건축역사를 재평가하고 선학과 어깨를 견줄 기반이라도 조성되어야 한다.
한국건축사 전공자에게 영어강좌를 강요하는 이 시대의 건축계가 과연 옳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그것이 진정한 동아시아의 건축역사를 쓸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길인지 묻고 싶다.

김영재 2010-02-16 (화) 00:50 10년전
저는 이토츄타가 1909년에 썼던 건축진화원리에 따라 보여진 우리나라의 미래와 호류지건축장식론이 라는 글을 읽어보면서[글의 문체가 현재와는 달라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략적인 이해는 되었다], 몇가지 놀라운 점은 생각이 상당히 진보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화라는 의미가 그 당시 유행했던 스펜서나 다윈의 생각과는 많이 멀어져 잇었고, 새롭게 그 의미를 자신들의 취미와 문화에 맞게 재정의 했다는 점에서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건축의 양식을 접하는 방법에 있어서 전통적인 접근과 기계적인 접근, 즉, 깽시와 듀랑이 사용했던 방식을 통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서양에서는 모네오에 의해서 2분법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를  시도했던 것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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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수 2010-02-16 (화) 02:03 10년전
그 이유는 당시 일본의 현대건축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의 개척에 따라 일본건축의 원류를 재편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토 츄우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방향의 지식으로는 불가능하고 그가  교육받고 활동한 일본 교육,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의 상황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겠지. 특히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일본의 외래어에 대한 번역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고 이에 대한 몇 권의 서적은 국내에도 번역이 되어 나와 있지만 보다 광범위한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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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2010-02-16 (화) 11:17 10년전
이토는 호류지 건축장식론에서 보면, 처음에는 대륙건축의 영향을 매우 강조하다가, 차츰, 1940년 호류지라는 책을 내면서, 일본의 취미와 정신을 바탕으로 대륙건축의 영향을 받았기 ㅤㄸㅒㅤ문에 일본건축은 중국이나 한국건축과는 다르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건축진화원리를 말하면서 이러한 그의 생각은 예상된 것이엇습니다. 그는 이 논문에 있는 세계건축도에서 일본건축을 중국, 한국, 안남과 동일한바운더리에 넣고 있지 않습니다. 일본건축의 경계를 동그란 원의 반은 지나, 한국, 안남건축의 안에 있고, 그 나머지 반은 외부로 노출을 시켜서, 일본건축을 중국건축과 분리시키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호류지 건축론[1893-8, 세번에 걸쳐서 작업]에서는 일본건축의 곡선을 중시했지만, 1920년대 이후에는 일본건축의 직선의 미를 강조하기 시작햇다는 점에서 이미 의원건축을 의식해서 작성된 건축진화원리를 발표하면서 대륙건축과의 분리를 구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생각은  1894-95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한 중국과 한국으로 부터의 민족우월감에서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일본국이 한국과 중국으로 부터의 역사적 사대로 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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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2010-02-17 (수) 16:59 10년전
저는 제 논문을 쓰는 과정에 있어서 이토츄타를 알게되었는데.. 남산 공원 내 신사들을 계획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 사람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공부를 하고 나면, 일제시대에 행해졌던 우리나라 도시계획이나 건축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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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2010-02-17 (수) 21:23 10년전
그렇다고 합니다.  이토는 남산 신사를 신메이조 스타일로 설계했습니다.
그 이유는 2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첫번째는  이토는 신사의 건축사는, 직선적인 타이샤조나 신메이조의 시대를 거치고, 카스가조나 나가레조가 등장하는 곡선형 시대로 이행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하나는, 신사는 강점시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한국의 다른 거류지들에 신메이 쥬쿠리의 작은 사당을 세워서 대신궁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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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수 2010-02-18 (목) 22:45 10년전
일본인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신사를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본 카나가와 대학에서 만든 세계 각국에 분포하는 일본신사에 관한 정보를 정리한 사이트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현재 우리가 다시 주목할 부분은 일본학계가 과거에 지어진 신사의 변화과정을 학술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장소와 건축물이 사회의 변화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추적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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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2010-03-02 (화) 11:30 10년전
이토가 개입한 남산의 신사에는 크게 남산대신궁(후에는 경성신사로 다시 개축하였습니다.)과 조선신궁이 있습니다. 두 신사는 사격이 다르니 만큼 설계상의 스타일도 많이 달랐습니다. 남산대신궁을 비롯한 경성신사 외 노기신사, 도하나리 등의 현 숭의학교에 세워진 몇 가지의 신사들은 직선 배치는 아닙니다만, 조선신궁은 직선배치를 따랐습니다. 신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쓰는 논문과 연관을 지어 서술한다면, 조선신궁의 배치는 이래저래 해도 결국 지형적 조건에 맞추어 지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조선신궁에 들일 수 있는 예산을 점점 줄이고 있었다는 점을 비추어 볼때, 그리고 조선신궁의 상,중,하 광장 중 상광장과 중광장은 기존 한양공원의 북광장과 남광장의 터를 거의 그대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남산의 등고 또한 그 두 광장을 거의 직선으로 잇는 형상을 하고 있어 신궁 배치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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